제주 바람 강한지역 풍해 많이 발생...풍해대응 농법 방풍림 조성과 돌담 축조
돌담 쌓게 된 계기...고려 고종 때 판관 김구의 명 의한 것 알려져
대표농법 ▲강풍대응 농법 ▲한해(가뭄)대응 농법 ▲폭우대응 농법 ▲지력저하대응 농법 등
지력저하대응 농법...정기적 2~3년간 휴경농법 ‘쉬돌림’적용...현재 화학비료 활용 1년 2~3모작

.(사진출처=김오진 박사, '조선시대 제주도 이상기후와 문화')

제주는 광풍과 폭우가 빈번하고 가뭄이 자주 발생해 농사짓기에 불리한 기후환경임을 잘 표현하고 있다.

제주도의 지질과 토양 환경도 좋은 편이 아니다. 이런 환경특성은 제주 출신으로 개성부 유수를 지냈던 고태필의 상서문에 잘 나타나있다.

정조는 기후재해로 기근에 시달리는 제주인들을 위로하는 윤음을 내리면 서 제주도의 지역 환경과 그 가치를 잘 표현하고 있다.

조선시대 제주인의 주된 경제활동은 농업과 어업이었다. 농·어업은 자연환경, 특히 기후와 기상 조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제주인들은 이상기후에 적절히 대응하며 농업과 어업 등 생업활동을 영위해 왔다.

조선시대에 제주도에는 이상기후 대응 농법으로 위기를 타개한 적이 있다. 이에 현대에도 비료와 농약 등이 아닌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농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성종 24년의 기록을 보면 제주도의 기후 환경이 잘 나타나 있다. “제주 땅은 바위와 돌이 많고 물이 잘 새기 때문에 2, 3일 비가 오지 아니하면 가뭄이 먼저 드는 형편이라 씨를 붙이는 시기를 잃게 되고, 겨우 싹이 서게 되어도 말라 죽기가 쉽다. 또 바다에 폭풍이 갑자기 일어나서 짠 물결이 충격해 사방에 흩어져 떨어지기를 비가 오는 것과 같이 하니, 곡식이 죽어서 해마다 실농한다”라고 했다.

농업은 다양한 자연적 요인에 영향을 받지만, 1차적으로 기후 요인이 많이 작용한다. 기후는 농작물의 생장과 풍흉, 농민들의 농업 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제주도 농민들은 이상기후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농업 활동을 전개했다.

제주도는 삼재도라 불릴 만큼 농업 활동에 불리한 기후환경이었다. 김석익의 ‘탐라기년’에 여름에 조정에서 제주도의 세(稅)를 정할 때 총대신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이 섬의 지세는 산이 높아 풍재가 많고, 곡이 깊어 수재가 많으며, 토지가 척박해 한재(가뭄)가 많다. 삼재가 병침(幷侵)해 해마다 반드시 흉년이 많으니 만약에 납세를 책하면 백성이 살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대표적인 농법을 보면 ▲강풍 대응 농법 ▲한해(가뭄) 대응 농법 ▲폭우 대응 농법 ▲지력저하 대응 농법 등이다.

특히 제주도는 바람이 강한 지역으로 풍해가 다른 재해에 비해 많이 발생했다. 풍해에 대응해 제주도에서 이루어졌던 대표적인 방풍농법은 방풍림 조성과 돌담 축조이다.

현재의 돌담 경관은 조선시대에 이미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밭에 돌담을 설치했고, 인가에도 높게 울담을 쌓았다. 제주인들은 바람 피해를 줄이기 위해 밭에 돌담을 축조했고, 방풍수로 대나무, 동백나무 등을 심었다.

오늘날의 감귤원도 방풍수가 대나무에서 삼나무로 바뀌었을 뿐 기본구조는 비슷하다는 것.

해양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과 조풍해를 방지하기 위해 해안가에도 방풍림을 조성했다. 또한 농경지, 민가 주위에 동백나무, 후박나무, 참식나무, 대나무 등으로 방풍림을 조성해 풍해에 대비했다.

제주도의 돌담도 강한 바람을 막는 방풍 역할을 했고 제주도의 민가나 농경지, 해안가 등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농업경관이다.

2007년 제주대학교 등에 따르면 제주도의 돌담 길이는 총 3만6천355km이고, 그중 밭담은 2만2천208km라고 했다.

제주도에서 돌담을 쌓게 된 계기는 고려 고종 때 판관 김구의 명에 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우마의 방목이 널리 행해졌다. 밭담을 쌓음으로써 방목하는 우마의 침입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경지 간 경계 역할을 해 토지 분쟁을 방지하는 기능도 했다.

조선시대의 기후재해 중 한해(가뭄)는 풍해, 수해와 더불어 삼재를 구성하고 있다. 한해에 대응했던 제주도의 대표적인 전통농법은 밧볼림‘답전(踏田)’농법이다. 밧볼림은 씨앗을 파종한 뒤 우마 등을 이용해 땅을 단단히 밟는 농법이다.

태종 11년(1411) 제주목사는 밧볼림에 대해 조정에 치계를 올렸다. 이 기록을 통해 밧볼림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제주도의 전통적인 농법이다.

밧볼림은 조와 산듸(밭벼), 피 등을 파종한 날에 했다. 조와 피의 종자는 가벼워 바람에 쉽게 흩날리고 비가 오면 잘 휩쓸리며, 새나 짐승의 먹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밧볼림을 하면 씨앗이 땅속에 묻혀 가물어도 발아에 유리하고, 싹 튼 다음에 뿌리를 땅속에 단단히 내릴 수 있다.

또한 폭우 대응 농법으로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 최다우지를 이루고 있다. 집중호우로 인해 농경지가 침수되고 토양이 유실되는 등 폭우 피해가 빈번했다.

폭우로 인한 표토의 침식은 농경에 치명적이고, 경지가 황폐화되어 버린다. 이에 대응해 제주인들은 경사진 농경지에 ‘시둑[두둑]’을 축조해 토양을 보호했다. 시둑은 계단식 경작의 하나로 경지 내에 등고선 방향으로 흙이나 돌로 둑을 쌓고 농경지의 흙이 씻겨 내려가지 않도록 하는 농법이다.

이와 함께 지력저하 대응 농법에 대해 제주도는 지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휴경하는 농법이 행해졌으며, 이를 ‘쉬돌림’이라고 했다.

김성구의 ‘남천록’에는 쉬돌림 농법에 대해 “제주도는 2, 3년을 연작하면 곡식이 여물지 않고, 또 새로운 밭을 개간하면 수년을 쉬게 한 후에 경작해야 한다”고 기록되고 있다.

제주도에 “땅을 못 견디게 하면 농사가 제대로 안 된다.”는 속담이 있다. 현재는 화학비료 등으로 년 2~3모작도 하고 있다.

해안지대는 보리와 조, 중산간지대는 조, 밭벼, 메밀 중심의 윤작을 했다. 산간지대는 토지 이용이 가장 조방적인 지역으로 밭벼, 피, 메밀, 감자 등을 중심으로 윤작을 했다.

한편 제주도의 전통농업을 보면 과거 서양에서 정기적으로 휴경했던 삼포식 농업, 여러 작물을 윤작했던 윤재식 농업과 유사한 농법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있다.

휴경기에 우마를 빈 밭에 몰아넣어 그 분뇨로 유기질을 공급하여 빠르게 비옥도를 증진시키는 농법을 ‘바령’이라고 했다. 많은 비로 인한 과다한 용탈 현상은 유기질 결핍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에 지력을 유지하고 농업 생산력을 확보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휴경이 이루어졌고, 그 기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바령’이 행해졌다. 세종 때 고득종의 상소문을 보면 ‘바령’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농부들은 밭 가운데에 반드시 팔장이란 것을 만들어서 소를 기르고, 쇠똥을 채취해 종자를 뿌린 뒤에는 반드시 소들을 모아다가 밭을 밟게 하여야 싹이 살 수 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돗거름[돼지거름]은 제주인들에게 중요한 천연비료였다. 보리짚과 잡초 등을 돗통[돼지우리]에 넣어 분뇨와 섞이게 하여 만든 돗거름은 제주도 농사에 최고의 거름으로 쳤다.

1911년 오오노 아키츠키의 조사에 따르면 제주도에서 1909~1911년 3년간 연평균 사육 돼지수가 7만5천두이다. 당시 제주도의 가구는 3만5천 55호로 1가구당 2.1마리씩 돼지를 기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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