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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재학 참전용사, "38선주민 '아들 인민군과 한국군 입대 서로 싸우고 있다'며 울었다"

기사승인 2020.06.24  04: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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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문맹많아 한글교육대는 신병에게 한글을 일깨워 신병 배치했다”
참전용사, "한림초등학교(당시 초등학교)에서 몇 백 명이 갔는데 많이 사망했다"..."백마고지, 한석산 전투 등 앞에서 (제주동향 전우 등)쓰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회고

용산전쟁기년관 입구에 세워진 6.25전쟁을 상징하는 '형제의상'. 한국군 형과 인민군 동생이 전투에서 만만 장면을 연출한 모습.

제주 육군 제1훈련소 구술채록조사에서 제주도민인 학생출신 참전용사 신모 이등상사는 “19세 때 결혼해 입대했다”며 “부친이 몇 대 독자라 제주농업학교 재학 중 전쟁에 대한 두려움 없이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입대했다”고 말했다.

신씨는 “육군 제5훈련소 9사단 입소해서 교육을 받은 후 보병 제9사단 제30연대로 전속(제9중대 배속)되어 북진명령으로 38선 인제 잔교리에 주둔했다”며 “그 당시 노인부부가 있어서 시루떡(강냉이)을 떠다주어서 먹은 기억이 있고 아들들이 인민군과 한국군으로 입대해서 서로 싸우고 있다면서 울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한 장면 같았다. 살아있는 생생한 증언이 이어졌다.

그는 “1950년 제5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후 제 9사단으로 배치되어 매봉산과 한석산 등 높은 고지 전투에 직접 참여한 후 전투에서 세운 공로로 훈장(금성화랑무공)을 받고 하사에서 이등중사로 1계급 특진했다”며 “그 당시 한국 부대 군인들이 많이(60% 이상) 전사했다”고 했다.

이어 “교육대는 수용대 전신이었다. 한글교육대는 문맹의 신병에게 훈련이 가능할 수 있는 한글을 일깨워 신병을 배치하는데 훈련소 입소 전 일정한 장소에 모여서 한글을 교육시켰다”며 “최대 2주 교육(16주 훈련에 미포함) 후 부대 배치를 받았다. 중·고등학교 교사 출신들이 가르쳤는데 이들 중에는 제주도 출신도 있었다. 주로 수용대 내 막사(천막)에서 집중 교육했는데 제주도 사람보다 육지 신병들이 많았다”고 진술했다.

그는 “한림초등학교(당시 초등학교)에서 몇 백 명이 갔는데 많이 사망했다”며 “같이 간 사람도 있고 흩어진 사람도 있고 해서 전쟁은 비참한 것이다. 이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오늘밤 같이 있다가 내일 쓰러져서 죽었다. 백마고지, 한석산 전투 등 앞에서 (제주동향 전우 등)쓰러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기획 6.25 70주년 Ⅱ]◆제주 육군 제1훈련소 부대시설 구술채록

사례 #1 제주농업학교 재학중 참전한 신모 이등상사의 구술채록을 소개한다.

▲ 육군훈련소 입소 동기

신모 이등상사는 "1950년 19세 때 결혼해 입대했다. 부친이 몇 대 독자라 제주농업학교 재학 중 전쟁에 대한 두려움 없이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입대했다"고 한다.
 
"육군 제5훈련소 9사단 입소해서 교육을 받은 후 보병 제9사단 제30연대로 전속(제9중대 배속)되어 북진명령으로 38선 인제 잔교리에 주둔했다. 그 당시 노인부부가 있어서 시루떡(강냉이)을 떠다주어서 먹은 기억이 있고 아들들이 인민군과 한국군으로 입대해서 서로 싸우고 있다면서 울었다"고 전했다.

▲ 훈련소 퇴소 후 상황

"1950년 제5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후 제 9사단으로 배치되어 매봉산과 한석산 등 높은 고지 전투에 직접 참여한 후 전투에서 세운 공로로 훈장(금성화랑무공)을 받고 하사에서 이등중사로 1계급 특진했다. 그 당시 한국 부대 군인들이 많이(60% 이상) 전사했다"고 했다.

"1951년 강원도 철원 백마고지(395m)전투 참여 당시 인민군들이 방멩이 수류탄을 던져서 그때 가슴에 파편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매봉산 전투에서 강원도 금화로 옮기면서 1달 동안 예비대로 편성되어 원산에서 평양까지 갔다. 도로에 주둔해서 도로정비를 하거나 공비를 소탕(금화 경비대)했다."

"1951년 강원도 철원 매봉산(950m) 백마고지 전투에 참가했다. 폭격을 많이 해서 395m 고지 산이 하얗게 변했다고 했다. 당시 인민군 당사에 주둔(현재 문화유산으로 보존)했음. 철원에서 제주도 출신 군인(친한 육군 소위 고모 씨 등)들이 많이 죽었다. 백마고지 전투 전에 본인 이름(장교, 하사관 등)이 호명돼 보충대로 가게 됐다. 부상당한 것을 알고 살고 싶다고 해서 제주도에 가고 싶다고 했다"고 밝혔다.

▲ 부대시설인지

- 수용대
1952년 제1육군훈련소 수용대(사계리) 배치를 받고 근무(이등상사로 진급)했음. 제주 육군 제1훈련소는 제2훈련소와 제5훈련소가 통합했는데 나중에 훈련소는 강병대로 명칭 변경했음. 본부 위치는 헌병대와 수용대 사이 전면(훈련소 내)에 있었다.

처음으로 수용대(사계리) 초가집에서 근무했음. 중공군 포로수용소가 철거(폐쇄)되어 수용대가 이전하면서 넒은 면적을 차지하게 되었다. 수용대장은 대령 혹은 준장이었다.

수용대 역할은 신병들이 LST(군용 수송함)를 타고 화순항에 도착하면 항무대(항만근무)에서 신원을 파악하여 수용대 기간사병에게 인계하면 신병들의 여러 상항을 고려하여 부대 배치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기간사병이 신병들을 산방산 앞(항무대)에 집합시켜 수용대(사계리)까지 도보로 가는데 1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LST 1척에 1천명 수송했는데 하루에 2.5척 정도로 이틀에 최대 5척이 도착했다. 전사자가 많을수록 LST를 많이 보내 왔으니 그 만큼 전선이 치열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LST 하루에 몇 척이 오느냐에 따라 한국군 전선 상황이 파악됐다. 옷을 입고 오거나 훈련소에서 입히는 경우도 있었다.

수용대 병무과(병무 계장)는 의무대에서 신체검사 후 부대 편성을 하게 되는데 몇 명 정도 돌려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작전과(선임하사, 일등중사)는 부대 편성 등 이런 저런 업무(행정과)를 수행했다. 인사과(선임하사, 이등상사)는 수용대 기밀 및 행정요원이나 기관요원 배속 등을 담당해서 지위가 최고로 높았다.

수용대 기관사병은 사계리 가정집에서 많이 거주했는데 이모씨(전 제주도 기획실장) 부친 집에 거주했다. 전방에서는 월급을 받지 못했지만 훈련소에서는 재워주고 월급도 받았다. 훈련소에서의 월급은 당시 화폐 단위인 환(圜)으로 받았다.

상사들은 사계리에서 영외거주를 많이 했는데 그곳에 장교들이 많아 살았다. 훈련소에 일찍이 가야해서 9시 전에 정시 출근했다. 산이수동은 사계리에서 영외 거주할 때 수용소와 가까 와서 술집이 많아 한일 소주에 해산물(조개, 전복) 안주로 회포를 풀었다. 부락에 해녀가 있어서 가능했고 산이수동 앞 바다를 해수욕장으로 이용했다.

기관병 및 장교는 4년 만기 제대이지만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본인은 5년 1개월 근무했는데 1955년 10월 일등중사에서 상사 진급을 빨리하게 되어서 1년 더 근무했다.

수용대 식당은 본부를 중심으로 장교 식당, 하사관 식당, 사병 식당으로 구분하여 가까운 거리에 설치되어 있었다.

식사로는 백반. 부식(김치, 국, 고기, 콩나물, 해산물 등)이 나왔는데 매일 나오지 않았으며, 신병하고는 차이가 있었음. 수용대장이 바뀌면 신임 수용대장이 부임하기 이전까지 부대장에게 시켜서 전 신병들에게 비상이 많았다. 인사과에서 선임하사로 데려갔으며 연대장이 좋아했다.

제복에 단화를 신고 다녔는데 어떤 연대장(대령)이 발로 찬 적이 있었다. 기간사병 중에는 제주도 사람이 300명 이상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하사관학교 출신이거나 외부에서 들어왔다. 수용대 업무는 본부에 자주가지 않고 전화로 연락했다.
 
산방산 서쪽(제1~9연대는 차례대로 인성리까지 포진되어 있었음) 사계리 부락에 연대가 있었는데 인성리가 아닌 중앙으로 길이 나 있었다.
 
본부(모슬봉) 앞에 운암연병장이 있었고 부대 막사(쓰러져 가는 초가집 )는 수용대 안에 있었고 교도연대는 모슬봉 앞에 운전병학교는 대정초등학교에 있었다.

▲ 기타
"온양 방위학교는 6·25 이전 졸업하면 예비역 소위로 임관했지만 6·25 발발하자 현역 소위로 임관했다. 제주출신으로 홍병철, 서두수(고산 출신, 현역 소위에서 대령, 백마고지 전투에서 전사), 김봉수(육군 중위-대위, 온양방위학교 예비역 소위, 제5훈련소 소대장 역임), 장승경(회수 출신, 육군 소위, 신병 소대장 역임) 등이 있었다."

군악대는 2개 존재(훈련소 본부, 상모리)했고 급양생산대는 정확한 위치를 모르지만 부대마다 있었다.

교육대는 수용대 전신이었다.

한글교육대는 문맹의 신병에게 훈련이 가능할 수 있는 한글을 일깨워 신병을 배치하는데 훈련소 입소 전 일정한 장소에 모여서 한글을 교육시켰다. 최대 2주 교육(16주 훈련에 미포함) 후 부대 배치를 받았다. 중·고등학교 교사 출신들이 가르쳤는데 이들 중에는 제주도 출신도 있었다. 주로 수용대 내 막사(천막)에서 집중 교육했는데 제주도 사람보다 육지 신병들이 많았다.

"한림국민학교에서 몇 백 명이 갔는데 많이 사망했다. 같이 간 사람도 있고 흩어진 사람도 있고 해서 전쟁은 비참한 것이다. 이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오늘밤 같이 있다가 내일 쓰러져서 죽었다. 백마고지, 한석산 전투 등 앞에서 쓰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고동휘 기자 mykdh71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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