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평화공원 ‘평화의 초석’ 각명비에 한국인 380명 중 제주인 5명 명단 확인
오키나와 130개소 위안소 아픈 역사의 현장 사리지고 있어

오키나와 평화공원 ‘평화의 초석’ 각명비 전경.

일제강점기 제주인들이 제주와 일본현지에서 강제 연행되어 태평양전쟁 중 가장 치열했고 희생이 컸던 오키나와전(沖縄戦)에 강제로 참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오티나와전(沖縄戦)에서 20여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키나와 평화공원 ‘평화의 초석’(平和の礎) 각명자 일견표(2017년 6월 23일 현재)에는 오키나와 14만 9456명, 오키나와 이외 일본 본토 7만 7426명, 미국 1만 4009명, 영국 62명, 대만 34명, 한국 380명, 북한 82명 등 24만 1468명의 전사자 이름이 각명되어 추모되고 있었다.

한국인 380명 중 가고시마(鹿児島)에서 전사한 1명이 오키나와 인근 전투에서 전사해 이를 포함해 제주출신은 5명으로 확인됐고 계속 조사 중이다.

이들은 故 김상길, 故 강인길, 故 김보환, 故 강석봉, 故 홍여진 님이며 오키나와 평화공원에 각명비에 이름이 새겨져 추모되고 있었다.

각명비 모습.

그러나 각명비 이름을 소개하며 오키나와와 대만인은 이름, 출신지, 전사한 장소 등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으나 한국과 일본 본토, 미군 등은 이름만 새겨져 심한 역차별이 느껴졌고 이에 한국인 유족들의 일부는 각명비에 이름이 각인되어지는 것을 고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오키나와 시민단체인 恨의 碑 모임 회원이자 향토사학자인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67.여)씨 따르면 오키나와 평화공원 각명비에는 현재 추가로 12명이 등록돼 392명의 한국인 이름이 각명된 것으로 알려졌고 지속적으로 각명비에 오른 명단이 추가되고 있었다.

또한 육상 전투에서 많은 전사자와 함께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67.여)씨 연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오키나와를 기점으로 인근 해상에서도 어뢰와 비행기 공습, 해전 등으로 죽은 전사자 명단은 6만871명으로 나타났다.

이중 83명은 출신지가 미상이며 당시 조선인 2619명, 오키나와 735명, 대만인 1042명이고 나머지는 일본 본토 도교(東京), 오사카(大阪), 북해도(北海島) 등 전국에서 차출돼 태평양전쟁  오키나와전(沖縄戦)에 참전해 전사했다.

조선인 2619명 중 1851명의 출신지가 알려졌으며 부모, 처, 형제 등의 이름도 분석되어 졌고 제주출신은 362명의 명단이 확보된 것으로 확인했다. 이들 제주출신 대부분은 노무현 정부시절 국무총리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서 파악한 국가기록원 자료에 대부분 등재되어 있었다.

이들 제주인들은 오키나와를 근거지로 일본근해, 동지나해, 북태평양, 남태평양, 남지나해, 필리핀, 대만, 대한해협, 오키나와 등에서 강제징병되어 전사했다.

전시 조선인 강제노동 조사 자료집 증보개정판(저자 다케우치 야스토 竹內康人)에 따르면 오키나와 등에서 전사한 조선인은 641명이다. 이중 203명이 출신지를 모른 채 이름만 알려졌고 출신지와 이름이 알려진 438명 중 12명의 제주출신 명단이 이름과 본적지, 전사자의 부인과 부모, 형제 이름 등이 알려지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제주에서 직접 강제노역 등을 위해 강제 연행되었고 일본 본토에서도 재일제주인들도 오키나와로 징병되어 강제연행 한 증거가 오키나와전(沖縄戦) 증언집을 통해 밝혀졌다.

이 증언집과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67.여)씨에 따르면 당시 29세 제주출신 청년이 태평양전쟁시기 오사카에서 오키나와로 징병되어 미군이 오키나와 상륙 시 포로가 되어 하와이 수용소에 머물렀으나 일본 내에서는 죽은 것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그는 수용소를 거쳐 살아있었고 이에 대해 증언했다.

오키모토 후키코 씨는 “자료상에는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며 “구술조사 내용에는 미군 포로로 잡혀서 포로수용소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오키나와 미야코 섬에 위안부를 추모하는 아리랑비 모습.

이와 함께 오키나와 미야코 일본군 위안부 추모비 건립위원회가 만든 비문에 따르면 아시아 태평양전쟁때 일본군은 일본식민지 점령지 여성들을 연행해 위안부 되기를 강요했다고 밝혔다. 오키나와에는 130개소 미야코서에는 16개소 위안소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태평양 전쟁시기 오키나와 섬들이 주요 군사적 전략 요충지임이 드러났다.

현재 오키나와 본섬과 부속섬내에 위안부 거처 등이 그대로 남아 았었으나 현지인에 따르면 그 원형이 심하게 훼손되고 파괴직전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편 이들 제주인들은 제주를 떠나 부산이나 오사카를 거쳐 시모노세키(下関)와 큐슈(九州)를 거쳐 오키나와로 강제 연행되어 오키나와 본토 14곳으로 이동했고 또한 오키나와 본토 이외 토카시키섬(渡嘉敷島), 미야코섬(宮古島), 이시가키섬(石垣島) 등과 일본 군함 등에서 군인 군속, 노무자로 참전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일본 본토에 있던 재일제주인도 오키나와로 강제 연행되어 전쟁의 도구로 이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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